생활체육 대회일정
전국의 스포츠클럽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제2회 전국스포츠클럽교류전이 11월 3일 문경시 일원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올해 교류전은 2회차로, 전국 88개 (예비)지정스포츠클럽 3,000여 명의 선수단이 문경시민운동장 등 14개 경기장에서 총 10개 종목(농구, 댄스스포츠, 배구, 배드민턴, 수영, 야구, 체조, 축구, 탁구, 테니스)에서 열띤 경기를 펼쳤다.현장을 가득 메운 선수들의 진지한 표정과 치열한 플레이는 대회 이름처럼 스포츠를 통한 우정과 교류의 의미를 잘 보여줬다.대한체육회 관계자는 “경기력보다 참여와 화합에 중점을 둔 이번 대회가 지역 스포츠클럽 간 소통의 장이 되었다”고 전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출전 당시 모습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한국인 육상 선수. 한국인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13]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일단 올림픽 선수 출전 인원은 3명이였기에 모두를 탈락시킬 수는 없었지만, 일본 국내 최종 선발전의 1등 기록이 2시간 35분이라는 평균보다 저조한 성적 때문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들어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3위 후보 스즈키 히로시게에 더해 4위를 한 후보 시와쿠 타마오를 예비 후보로 선발시켜 현지에 보낸 이후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를 열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 서있는 손기정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해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했다.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당시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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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체육인 - 손기정
1936 베를린 올림픽 출전 당시 모습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한국인 육상 선수. 한국인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이후 1936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동갑내기이자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였던 남승룡과 베를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참가했다. 일본 육상계에서는 당연히 순수 일본인을 뽑고 싶어했겠지만, 실력자라는 것에 이견이 없는 손기정과 남승룡을 떨어뜨리기엔 눈치가 보여서[13] 대표팀으로 발탁한다. 헌데 일본 육상계는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일본 국적으로 출전했던 조선인 선수 김은배, 권태하가 일본 선수의 페이스 메이커를 해주려던 전략을 무시하고 각각 6위, 9위에 랭크되었던 악몽이 있어서 일본 육상팀은 이 대회에서는 반드시 일본 선수를 많이 뽑으려고 했다.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일단 올림픽 선수 출전 인원은 3명이였기에 모두를 탈락시킬 수는 없었지만, 일본 국내 최종 선발전의 1등 기록이 2시간 35분이라는 평균보다 저조한 성적 때문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들어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3위 후보 스즈키 히로시게에 더해 4위를 한 후보 시와쿠 타마오를 예비 후보로 선발시켜 현지에 보낸 이후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를 열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 서있는 손기정1937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商科)에 입학했다. 당시 보전에는 재정학을 가르치는 홍성하(洪性夏) 교수가 체육부장을 맡고 있었다. 홍 교수는 뜨거운 민족주의자여서 학교 스포츠를 장려해 학생들의 사기를 진작시키자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그 지론으로 김성수(金性洙) 교장을 설득, 1937년에 전조선의 중등학교를 졸업하는 우수 운동선수 다수를 뽑아 상과에 수용했다.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 당시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손기정의 인생 후반부에서 특히 기억되어야 할 장면은 1988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최종 봉송 주자로 뛴 것을 들 수 있다. 사실 손기정은 성화 최종 봉송 주자가 아닌 성화 점화자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당연히 손기정이 성화를 점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극비에 부쳐져야 할 최종 점화자가 너무나 쉽게 예상되는 문제가 있었다. 
2주 전